길에게 길을 묻다
숭례문에게 길을 묻다 “죄송합니다. 한 15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20대 후반의 회사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한 30대 여성은 시계를 수시로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구른다. 머리 숱이 없는 30대 회사원은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어디론가를 향해 ‘전력질주’다. 백수가 된 지 석달 열흘 만에 오른 출근길 지하철. 그곳은 오늘도 여전히 치열했다. 오전 8시 50분.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볼 수 있었던 숭례문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사라진 서울역은 여전히 낯설다. 숭례문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숭례문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은 전국으로 생중계됐고, 사람들은 망연자실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숭례문은 어떤 모습일까? 숭례문 한켠에는 불 타 없어진 대한민국 국보 1호에 대한 추모가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숭례문의 공사 진행 현장을 볼 수 있는 투명막이 설치돼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돌아봐라!” 서울성곽이 말하는 듯했다. 서울성곽의 물음을 안고 회현역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한 가장에게 길을 묻다 회현역에서 남산으로 향하는 길 위에는 이방인의 모습이 눈에 자주 띄었다. 서울에서 자라온 나조차도 이곳에 발걸음을 두지 않았거늘, 이방인들은 이곳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어갈까? 백발이 성성한 외국인 부부가 내 앞길을 걷는다. 그들은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서로의 머리카락을 다듬어 줬다. 뒤이어 일본 여행객이 남산에 오른다. 연인처럼 보이는 이 커플은 담소를 나누며 이 길을 걸었다. 그 앞으로는 한 가족이 남산의 굽이진 오르막을 걷고 있었다. 아이들 방학을 맞아 이 길에 서 있는 듯했다. “남산에 가는 길이신가봐요?” 가장은 대답했다. “가장 노릇하러 다리품 팔고 있어요.” 이 가족의 집은 광주다. 아이들 방학을 맞아 서울을 찾았다. 이번엔 아이에게 물었다. "남산에 가면 제일 보고 싶은 건 뭐야?” 아이는 신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알렉스랑 신애가 걸어놓은 자물쇠요.” 옆에 있던 엄마가 말을 보탠다. “이놈이 하도 졸라서 올라가는 거예요. 그 자물쇠 사진 찍어간다구 계속 조르는 거 있죠.” 언제부턴가 남산은 사랑의 자물쇠로 대변되고 있었다. 남산에게 길을 묻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있어서도 남산에 대한 기억은 20대 좋은 시절에 보냈던 데이트 기억 뿐이다. 나는 어린 시절 남산 밑 후암동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남산과 서울성곽은 어린 나에게도 멋진 야경과 캔커피 한잔의 낭만을 기꺼이 선물했다. 남산은 오늘도 젊은이들에게 사랑과 낭만을 선물하고 있었다. 남산 구석에 쳐진 철조망에는 이른바 ‘사랑의 자물쇠’가 빈틈없이 빼곡히 걸려 있다. ‘사랑의 자물쇠’ 때문에 철조망을 늘렸다는 언론보도를 접한 적은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 대학생 커플이 한 장의 사진을 부탁한다. 사진기 속 이들의 미소에는 행복함이 가득 묻어 있다. 남산 정상에 올라오니 두 다리에 후끈후끈 통증이 몰려왔다. 1시간 30분의 등산 아닌 등산에도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역시 몸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에 사뒀던 김밥을 꺼냈다. 편의점에서는 뜨겁게 달궈진 커피 하나를 집었다. 20분간의 꿀 맛 같은 휴식시간이 지나고, 나는 국립극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는 길에 왼쪽 오르막 길에 길게 줄 서있는 성곽을 만났다. 하지만 그곳은 군사지역이어서 통행이 제한된 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왼쪽 오르막길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길의 이름은 ‘성곽 탐방로’다. 이곳 성곽은 잘 보존돼 있겠지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미움, 이기, 질투 … 계속되는 역사의 반복 ‘성곽탐방로’ 길은 한적했다. 간혹 이곳을 눈과 마음에 간직하려는 사람들과 마주치곤 했는데, 먼 발치에 보이는 한 어르신이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여기는 전쟁 때 무너진 것 같아. 시멘트로 지어진 성벽이잖아.” 옆에 있는 또 다른 어르신이 대답한다. “어. 그러네. 아마도 자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어르신들이 뒷짐을 지고 바라보는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성벽 옆에 몇 백년도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시멘트 성벽이 오래된 성벽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가벼운 시멘트의 존재는 그 공간을 완벽히 메우지 못했다. 갑자기 오늘 조간 신문 1면에 실린 아이티의 참혹한 사진 한 컷이 떠올랐다.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은 아직도 여전히 전쟁 중인 나라다. 다만 휴전이라는 약속하에 오늘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을 뿐, 언제든지 그 참혹한 역사는 반복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참혹한 전쟁 탓에 우리 아버지들은 배고픔에 절규해야 했으며, 아들에게 배고픔의 고통을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때로는 외국에서 땀을 흘렸고, 때로는 타국에 피를 팔아야만 했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으로 우리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살 수 있었다. 전쟁이라는 인재와는 그 과정이 차이가 있지만, 그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오늘의 아이티가 어제의 대한민국이다. 대재앙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어제의 대한민국에 많은 도움을 준 전세계 사람들처럼 말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길을 잃다
서울성곽을 따라 걷다보니, 길을 잃었다. 서울성곽 종주를 위한 안내판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탓이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간신히 동국대학교 쪽으로 빠지는 길을 발견했다. 당초에는 국립극장을 지나 흥인지문을 갈 생각이었지만, 계획을 바꿔 동국대 뒷길을 통해 가기로 했다. 남산에서 내려오니 다시 일상 속이다. 꽉 막힌 도로 위 ‘빵빵’ 울려대는 자동차 클랙션 소리는 내 앞길을 막지 말라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좌절은 공격을 야기한다는 심리학 이론처럼 자기 자리를 빼앗겨 좌절한 자동차는 연신 ‘빵빵’ 대며 분노하고 있었다. 남산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퍼 주지만, 인간은 그리도 너그롭지 못한가보다. 도심은 단 1초의 여유도 없이 그렇게 돌아갔다. 장충체육관을 지나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사이 성벽은 눈 앞에서 사라졌다. 성벽이 있었던 자리는 고층 빌딩이 대신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성벽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생각을 하니 성곽에게 미안했다. 장충체육관에서 흥인지문까지 걷는 동안 성곽의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흥인지문에 도착한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흥인지문 오간수문터를 알리는 비석 앞에는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무관심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파괴하는 길 위의 사람들. 성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품고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서울성곽을 바라보며 약속했다.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는 더 이상 너의 자리를 빼앗지는 않을께. 적어도 너를 기억하고 너의 자리를 아끼는 평생 친구가 되도록 노력할께. 미안하다 성곽아, 진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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