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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교차로^^*

안승복 (천수) 2010. 1. 22. 19:13
인생의 교차로에 선 이들이 가볼 만한 곳
5천원으로 만난 특별한 서울 ① … 항동 철길

                                                     

인기리에 연재됐던 '서울, 전설의 고향'에 이어 오늘부터는 새 연재를 시작한다. 서울은 넓고 갈 곳은 많다. 여행의 방법도 가지가지고, 여행에 관한 소개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이런 여행은 어떨까? 아무 때나 맘만 먹으면 단촐하게 떠날 수 있고, 지갑 속엔 달랑 5천원 뿐이지만 결코 옹색하지 않고, 무작정 나선 길 위에서 뜻밖의 수확까지 얻을 수 있는 그런 여행. '5천원으로 만난 특별한 서울'은 가끔은 혼자서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마련한 감성 충전 여행 에세이다.

시간이 멈춘 철길

나는 백수다. 대학원 학기가 시작하는 올해 3월까지다. 백수, 겪어보니 그렇게 만만한 직업이 아니더라. 자고 있어도 자는 게 아니며, 먹어도, 먹지 못해도 배고프긴 마찬가지다. 친구를 만나도 편안함은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일 거다. 이런 백수 증후군을 없애기 위해 나는 나에게 큰 선물을 주기로 했다. 미뤄왔던 여행을 떠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여행이 5천원으로 가능할 리 만무. 따라서 지하철을 타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보기로 했다.

"이번 정차할 역은 천왕역, 천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기관사의 익숙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목요일 오후인 탓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하철 7호선 천왕역에 내린 뒤 2번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칼바람이 몰아친다.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 모자 등으로 중무장을 했지만, 동장군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다. 동네 허름한 가게에 들어가 뜨겁게 달궈진 캔 커피 하나를 골랐다.

"아주머니, 항동 철길 여기서…."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익숙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 아래로 5분만 내려가면 나와요." "아,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가보네요?" "그러게, 거기 그냥 철길인데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네요. 추운 겨울보다는 봄이나 가을에 더 많죠." 아주머니는 겨울에 이 곳을 찾아온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예. 간만에 시간이 좀 남아서 여기 저기 둘러보려구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오늘의 목적지가 더 궁금해졌다. "아주머니 수고하세요." 뜨거운 커피를 한 손에 감싸 쥐고 문을 나섰다.

5분 정도 걷다보니 오른쪽에는 아파트를 관통하는 철길이, 왼쪽으로는 운치 있는 철길이 맞이했다. 나의 발은 자연스럽게 왼쪽 철길로 향했다. 길게 늘어진 담벼락 뒤로는 빌라와 아파트 등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오래된 시골길과 아파트의 공존. 시간은 담벼락을 사이로 두고 멈춘 듯했다. 그 길을 5분 정도 걸었을까? 멀리 보이는 언덕이 또 다른 느낌의 도심을 예고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지나자 옛 시골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딱딱하기만 한 서울에도 이런 시골이 있다니! 인간의 가공이 서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길게 펼쳐진 이 길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60년대 모습 그대로였고, 고향의 포근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나 눈을 밟았을까? 시골길에서 시선을 끄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이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내용의 표지판이었다. 코스모스 길도 조성될 계획이고, 시민들이 쉴 만한 공원을 만든다는 내용이 이 표지판의 주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처럼 날 것 그대로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아지트를 잃겠구나 하는 걱정이 교차했다.

철길 위로 쌓인 눈을 따라, 그 옆에 펼쳐진 자연을 따라 걷다보니 덩그라니 놓여진 오두막이 시선으로 들어왔다. 이 오두막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었을까? 비가 내리면 피할 곳을,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볕을 피할 수 있는 이곳. 이 이미지가 고향과 딱 맞아떨어진다. 맘 속에 쉼을 그리는 도시인들이 항동 철길을 찾아오는 이유인 듯했다.

눈길을 걷다보니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아니 느낌이 온몸에 전해진다. 도시인 중에 눈길을 즐거워하고 그리는 이 얼마나 될까? '우드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눈길을 걷는 이 느낌도 얼마만일까? 항상 긴장하며 바쁘게 보내는 직장인 대신 이 느낌을 느낄 수 있는 백수라는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해야겠다.

눈앞에 멈춤이란 단어가 들어왔다. 기차와 사람이 만나는 교차로에 설치된 표지판. 마치 마법사가 이곳에 주문을 건 것처럼 건너편에는 고층 빌딩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곳은 예전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쉼과 행복 그리고 살아내기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쉼을 느끼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항동 철길 인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최진철(46) 씨는 이곳을 3년째 꼬박 다니고 있다. 자신의 일터가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려면 이곳을 지나가야 합니다. 물론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 되지만, 가급적으로 항동 철길을 따라 가고 있어요. 이 길을 걷다보면 느끼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두막에서 쉬기도 하고 인생의 무게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고 말이죠."

웃음을 잃지 않았던 최씨는 이곳을 지날 때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다고 했다. "이 길을 걷다보면 부모님과 함께 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학교에서 하교할 때 어머니가 항상 오두막에서 저를 기다리곤 하셨죠. 그래서 이 길을 좋아합니다." 최씨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출액

교통비 1천 800원

디카 건전지 2천 400원

커피 500원

총 = 4천 700원

"악, 엄마!" 한 꼬마 아이가 눈길에 시원하게 미끄러진다. "어이쿠, 조심해야지!" 엄마가 놀란 듯 아이를 일으켜 세운다. 구로구 오류동에 사는 오현숙(37) 씨는 아이의 방학을 맞아 이곳을 방문했다. 오씨는 "이런 좋은 곳이 집 근처에 있어 가끔 아이 손을 잡고 놀러온다"며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인데도 항상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안쓰러워 가끔 이곳에 바람 쐬러온다"고 말했다. 오씨는 이어 "부모님들이 다 서울에 올라오셔서 아이가 시골 생활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곳에 오면 자연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며 아이가 흰 눈에 쓴 행복이라는 단어를 자랑했다.

오씨 모녀가 말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백수인 내가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취업일까, 결혼일까. 아니면 로또 당첨일까? 그 순간을 즐기고 매 순간 진지하게 노력한다면 이것이 바로 행복 아닐까? 대충 살아가지 않고 진지하게 살아낸다면, 그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닐까?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우직하게 살아내는 항동 철길처럼 말이다.

시민기자/차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