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한 궁녀가 어떻게 국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을까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인 창빈안씨 묘역
「창빈(昌嬪)안씨(安氏)는 중종 2년(1507)에 아홉 살의 나이로 궁녀가 되었다. 중종의 총애를 입어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고, 31세에 숙원(淑媛), 이어 숙용(淑容)까지 품계가 올랐다. 그녀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후손이 없는 명종을 이어 제 14대 임금인 선조로 등극하자 선조 10년(1577)에 창빈으로 추존되었다.」
조선 제 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祖母)인 창빈안씨 묘역 앞에 있는 문화재 안내판의 내용 중 일부이다. 궁중 계급이 나오는데 궁녀, 상궁, 숙원, 숙용, 빈 등이 그것이다. 상궁은 익히 들어서 알겠는데 숙원과 숙용은 어떤 계급이고 미천한 궁녀가 어떻게 국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시대에는 궁중 여성들을 위한 조직 체계가 있었나보다 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계급 체제, 즉 ‘내관’, ‘여관’ 등으로 불리던 궁녀 조직인 내명부(內命婦)가 존재하였다.
국가 최고의 통치기관인 동시에 국왕이 거주하는 궁중의 운영에는 자연히 많은 여성이 필요하였다. 궁중의 여성 조직은 국왕의 배우자로서 품계를 초월한 왕비와, 직임을 가진 내명부, 그리고 품계가 없는 궁인인 잡역궁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자로서, 위로는 국왕과 왕비를 모시고 궁중 내의 일정한 직임을 맡아보며 아래로 잡역궁인을 부렸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크게 두 계층이 있었다. 정1품 빈(嬪)부터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종4품 숙원(淑媛)까지는 왕의 후궁으로 내관(內官)이라 하고,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는 상궁계열로 궁관(宮官)이라 하였다.
내관 즉 후궁은 신분이 좋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인 후궁과 미천한 집안 출신의 궁녀로 승은(承恩)을 입은 후궁으로 나눌 수 있다. 후궁은 왕의 총애와 공로에 따라 예우를 받았다. 신분이 높은 가문 출신의 후궁으로는 태종(太宗) 대 정의궁주(貞懿宮主), 정조(正祖)의 후궁 원빈(元嬪)과 순조(純祖)의 생모 수빈(綬嬪) 등이 있다. 궁관은 궁중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상궁은 궁관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궁내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상궁의 신분은 양인(良人)에 속하며, 원칙으로는 내관과 엄격히 구분되었으나 왕의 승은을 입게 되면 내관으로 승격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경종(景宗)의 모친 희빈(禧嬪)장씨(張氏)와 영조(英祖)의 모친 숙빈(淑嬪)최씨(崔氏) 등이 궁녀 출신이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내에 있는 창빈안씨(昌嬪安氏 : 1499~1549)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무덤을 만든 이후 풍수지리에 의거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명종 5년(1550) 3월 이곳으로 옮겨졌다. 묘 입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숙종 9년(1683)에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묘소 동남향 이른바 귀신이 다니는 길에 세우는 비석으로서, 아무나 세울 수 없는 국가가 허락하는 기념물이다.
그 자격은 조선시대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고위 관료이고 뚜렷한 업적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에 국한한다. 전국에 각 문중과 집안을 대표하는 이들의 신도비가 산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처럼 후궁의 묘소에 신도비를 세운 예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다. 비를 세우게 된 경위로는 창빈에 대한 숙종(肅宗)의 마음에서 연유된다. 창빈이 별세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세웠다는 것인데 이는 실록이나 각종 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창빈의 바른 인품과 현숙함에 더하여 그의 현손이 선조 이후 역대 임금을 계승하고 있는데 대한 업적이 지대하므로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현충원 경내에 있는 창빈안씨 묘역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가서는 그 넓은 경내에서 찾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현충원 안내도나 경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터치스크린 패널에서 창빈안씨 묘역은 아예 누락되어 있다. 창빈 묘역은 고 김대중 대통령 묘소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 안내판을 뒤로 하고 10m 정도 오르면 신도비가 나오고 신도비 뒤로 야트막한 동산 위에 묘소가 있다.
왕릉이 아니기 때문에 묘소는 작고 아담하다. 곡장(曲墻)이 둘러쳐져 있는 봉분과 무덤의 주인공을 기록한 비석, 석등, 석인(石人)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시대 후궁 묘역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