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조는 독살됐나" 방송 … 효종·고종 등 8명 의문사
주로 권력투쟁기에 해당 …치료법·음식 등에 많은 의혹 남아
조선시대 후기의 개혁군주 정조(正祖)의 사인(死因)을 둘러싼 세간의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가 지난해 펴낸 역사추리 스타일의 교양서 ‘조선 왕 독살사건’이 도화선 역할을 하고 있다. 이씨는 이 책에서 정조를 비롯, 효종(孝宗) 고종(高宗) 등 조선시대 군주 7명과 소현세자 등 모두 8명의 독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지난 8월 18일에는 KBS1 TV가 정조의 독살설을 심층 진단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정조에게 우호적이었던 남인(南人)이 다수 포진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잠복해 있던 정조 독살설은 1993년 정조시대의 권력투쟁을 그린 이인화의 팩션 ‘영원한 제국’이 대히트를 치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이 독살 당했다’고 명시한 기록은 한 구절도 없다. 그러나 야사(野史)에는 왕이 독살 당했다고 단언하거나 정황을 암시하는 기록이 적지 않다. 이덕일씨는 “조선왕조의 독살설은 왕 8건, 세자 2건 등 모두 10건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27명의 임금 중 8명이 독살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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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설이 나도는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관심이 쏠리는 임금은 역시 정조(재위 1776~1800)이다. 정조는 1800년 5월 30일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취지의 ‘오회연교(五晦筵敎)’ 발언을 하고 불과 20여일 후에 급서한다. 이 발언은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조는 부친의 죽음에 대한 화병으로 종기가 악화돼 그 해 6월 24일 훗날 논란이 되는 민간요법 ‘연훈방(烟熏方)’을 사용했으나 일시 증세가 호전됐을 뿐 혼미상태에 빠진다. 이 요법은 급성 수은중독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 28일 정조와 정적 관계인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계비)가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구급 처방의 일종인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직접 올리겠다고 실내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정조는 운명했다. 정순왕후의 처사는 대비나 왕비가 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당시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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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국민들. |
정조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정적(政敵)들로부터 끊임 없이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 자라나는 등 불우한 성장과정부터 극적이다. 게다가 조선왕조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군(名君)인 데다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탓에 “정조가 좀더 살아서 개혁을 성공시켰더라면 우리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대중의 아쉬움이 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절후(癤候·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조 사후 그의 사인을 둘러싼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 KBS1 TV ‘역사스페셜’은 지난 8월 18일 ‘조선 최대의 의문사-정조는 독살됐나?’편을 방송했다. 정조가 사망한 직후 전국 곳곳에 왕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괘서(掛書·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경상도 인동(지금의 구미)에서는 장시경이라는 선비가 “서울로 올라가 역적을 처벌하자”며 난을 일으켰다.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작성한 문서인 승정원일기에는 “갑자기 왕이 죽었으니 의관(醫官)이 의심스럽다”고 돼 있다. 정조 사후 전남 강진으로 유배 간 정약용은 ‘여유당전서’를 통해 독살이란 표현을 남긴다. 그만큼 세간에서는 정조가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 다음으로 독살설이 관심을 끄는 임금은 북벌을 추진하다 숨진 효종(1649 ~1659)이다. 실록에 따르면 효종은 서인 산당(山黨)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독대한 지 두 달 후 머리에 난 작은 종기가 원인이 돼 어의(御醫) 신가귀(申可貴)에게 침을 맞다가 숨졌다. 이상한 것은 신가귀가 수전증(손을 떠는 증상)을 앓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수전증을 앓고 있는 대통령 주치의가 대통령을 수술한 격이다.
그의 독살설 배경에는 북벌에 반대하던 서인 산당과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 지배세력인 사대부가 효종의 북벌정책에 반대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효종은 북벌을 성공시키기 위해 파격적인 무신 우대책을 폈고 이 때문에 사대부의 반감을 샀다. 효종은 북벌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대동법 등의 개혁정책을 실시했고, 서인을 비롯한 사대부는 자신의 기득권이 위협 받는다며 집단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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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
고종(1863~1907)은 정황상 독살이 유력하다. 고종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해외망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고종실록에는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사망했다고 돼 있지만 진짜 사망일이 그 날인지 불분명하다. 고종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 이완용 등 친일파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자 ‘연합신문’에 실은 글을 통해 “1918년 12월 19일 밤에 두 한씨(한창수, 한상학)가 독약이 들어 있는 식혜를 올려 고종을 독살했다”고 밝혔다. 애국지사 송상도는 저서 ‘기려(騎驢)수필’에서 “역신 윤덕영, 한상학, 이완용이 태황(太皇·고종을 가리킴)을 독살했다”고 기록했다. 독립운동가 선우훈은 ‘사외비사(史外秘史)’에서 고종의 7촌 조카인 이지용의 증언을 인용, 고종이 해외망명을 꾀하다가 계획이 누설됐고 일제가 이완용 등을 사주해 독살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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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이 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
고종의 독살설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낳았다. 3·1운동은 고종 인산일(因山日·장례일)인 3월 3일에 민족지도자들이 거사를 벌이려다가 일제가 눈치채자 이틀 앞당겨 실행한 것이다. 이는 고종이 비록 망국(亡國)의 군주였지만 백성은 여전히 고종을 조선의 국왕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왕들의 사인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는 음식은 다양하다. 인종(仁宗)은 사망 12일 전인 1545년 6월 18일 계모 문정왕후가 이례적으로 대접한 다과를 먹은 직후부터 이질, 즉 심한 설사를 앓는다. 문정왕후는 평소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인종을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인종은 6월 25일 설사를 많이 해서 기운이 매우 지쳐 있고 구역 증세도 있어서 사흘째 수라를 들지 못했다. 26일에는 눈동자가 술 취한 사람처럼 흐릿해지고 헛소리까지 했다. 인종은 결국 7월 1일 숨졌다. 불과 서른 살의 젊은 나이였다.
선조(宣祖·1567~1608))는 찹쌀밥을 먹고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인조(仁祖)의 말을 인용, “선조는 승하하는 당일 미시(오후 1~3시)에 광해군(光海君)이 올린 찹쌀밥을 먹고 기가 막혀 이내 숨졌다”며 “중간에 어떤 농간이 있었다는 말은 실로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시 선조는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상태여서, 나중에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은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경종(景宗·1720~1724)의 사인에는 게장과 생감, 인삼차가 관련 있다고 의혹이 제기됐다. 1724년 8월 21일 노론계인 대비 인원왕후(숙종의 계비) 김씨와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게장과 생감을 올렸는데, 경종은 그날 밤부터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다. 실록에서는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삼차를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다.
일본은 우리 스스로 민족성을 비하하도록 당파싸움을 악의적으로 해석했는데 특히 18대 현종(顯宗·1659~1674)대의 예송논쟁을 ‘쓸데없는 정쟁의 대명사’로 선전했다. 그러나 예송논쟁은 당시 권력투쟁의 수단이었을 뿐 우리 민족이 공리공론을 일삼는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현종은 집권세력이던 서인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2차 예송논쟁을 주도했다. 현종 대의 1~2차 예송논쟁의 핵심은 현종의 선왕인 효종을 인조의 사실상의 장남으로 인정하느냐 여부였다. 서인은 효종을 인조의 장자(長子)가 아닌 중자(中子·둘째)로 간주하고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서인의 효종 독살설이 유포됐는데도 힘이 없어 마땅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현종 입장에서는 이를 방치할 경우 자신의 정통성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2차 예송논쟁을 승리로 이끈 현종은 남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으로 제수한 직후 갑자기 병석에 눕는다. 병명은 독살 혐의가 있을 때 흔히 둘러대는 복통이었다. 현종은 1674년 7월 24일 이후 침과 뜸을 맞았고 8월 7일부터는 극심한 피로까지 느꼈다. 허적은 8월 17일 충주에서 상경했으므로 이 때는 아직 남인이 정권을 잡기 전이었다. 현종은 8월 18일 밤 10시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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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화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영원한 제국'의 한 장면. |
왕은 아니지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사도세자(思悼世子)도 독살설에 휘말렸다. 소현세자는 실록상으로도 독살의 징후가 가장 뚜렷하다. 실록은 사망 당시의 상태에 관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적었다. 이는 독살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독살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을 얼마 앞두지 않은 12대 인종(1544~1545) 때부터다. 이때 조선왕조는 초기의 활력을 잃어버리고 쇠퇴의 조짐이 역력했다. 외척과 권신들이 설치면서 왕권이 약해지는 악순환의 덫에 빠졌던 것이다. 선조 때부터 당쟁이 본격화하면서 왕권은 한층 약해진다. 외척의 발호는 왕이 바뀌면 수그러들지만 당쟁은 왕의 교체와는 관계 없이 지속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덕일씨는 “이미 생명력이 다한 왕조국가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명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국왕독살설”이라며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니라 당론을 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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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살설을 다룬 역사교양서 '조선왕 독살사건'. |
국왕독살설이 나돌 때는 대체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왕과 반대 당파가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왕이 사망한 후 반대 당파가 집권한다는 법칙이다. 고종의 경우는 외세의 사주를 받은 독살 의혹이므로 예외다. 또 왕의 반대 당파가 독살설의 주역으로 떠올라도 숙청 당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을 왕위에 앉힐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왕을 독살하기 위해서는 왕을 지근 거리에서 모시는 상궁, 내시, 어의 등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왕권과 신권의 힘이 너무 차이 날 때는 국왕을 독살할 필요가 줄어든다. 순조(純祖)-헌종(憲宗)-철종(哲宗)대에 안동 김씨, 풍양 조씨가 전권을 휘두른 세도정치처럼 신권(臣權)이 압도적으로 셀 때는 국왕 독살설은 유포되지 않았다. 왕조시대의 왕권은 너무 세도 곤란하지만 너무 약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집중적으로 제기되는 국왕 독살설은 왕권이 너무 약해도 국운이 쇠퇴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조선왕조500년간 내명부직첩 을 받은후궁은120명 2.궁녀가 승은 입은 후궁이더많다. 3.자손이없는후궁은왕이승하하면동대문근처 정업원에들어가 비구니신분으로왕의 명복을 빌며 살아간다. 4.세종의아들문종은세자기간이29년이나지냈다. 5.문종은37세에왕에등극2.4개월의제임후사망. 6.12살의어린나이에왕좌에오름.세종의후궁혜빈양씨의도움성장. 7.계유정난=수양대군의왕권찬탈-현덕왕후(단종의모친)의부친까지신분을 서인으로폐하고무덤을없애버림. 8.세조3년에맏아들 의경세자의20세에죽음.-현덕왕후에게화풀이를함. 9.성종9년에남효온에의해현덕왕후복위가거론됨. 10.세종+소현왕후심씨=8남2녀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이영대군 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정소공주.정의공주, 11,문종-현덕왕후,(1남단종.1녀경헤공주)귀인홍씨.사칙양씨(1녀경숙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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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2006.09.04]
1.조선왕조500년간 내명부직첩 을 받은후궁은120명 2.궁녀가 승은 입은 후궁이더많다. 3.자손이없는후궁은왕이승하하면동대문근처 정업원에들어가 비구니신분으로왕의 명복을 빌며 살아간다. 4.세종의아들문종은세자기간이29년이나지냈다. 5.문종은37세에왕에등극2.4개월의제임후사망. 6.12살의어린나이에왕좌에오름.세종의후궁혜빈양씨의도움성장. 7.계유정난=수양대군의왕권찬탈-현덕왕후(단종의모친)의부친까지신분을 서인으로폐하고무덤을없애버림. 8.세조3년에맏아들 의경세자의20세에죽음.-현덕왕후에게화풀이를함. 9.성종9년에남효온에의해현덕왕후복위가거론됨. 10.세종+소현왕후심씨=8남2녀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이영대군 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정소공주.정의공주, 11,문종-현덕왕후,(1남단종.1녀경헤공주)귀인홍씨.사칙양씨(1녀경숙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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